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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짐

 

* 병장

우리가 해안에서 심심해서 했던 놀이 중 하나는 이종격투기였다.

취사장 청소가 끝나고 나와 킥복싱을 했다는 6개월 고참은 간단한 스파링을 했고 손가락이 부었다.

정기적으로 오는 군의관에게 손가락을 매주 보여줬지만 큰 문제 없고 쉬면 된다고 했다.

 

병장 휴가를 나갔을 때 손가락이 부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수술을 하고 3일간 입원을 해야 했다. 돌아와서는 연대본부 의무실에 입실했다.

약 2주 정도 있었다.

근무도 없으니 편히 쉬고 싶었지만 눈이 오면 환자들을 불러내어 눈을 치우게 했다.

부러진 손가락은 장갑을 낄 수 없어 주머니에 넣고 한손으로 깨작깨작 눈을 치웠다. 

군대에서 의무대 관련 기억은 좋은게 하나도 없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실 병장이 되고 난 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었다. 춥고 배고팠고, 지루하고 피곤했다.

봄이 되었고 여름이 오기 전 우리는 해안을 떠났다.

이사를 하기 전날 난 창고에 쳐박혀서 친한 후임 두명과 술을 마셨다.

난 20살때 입대를 했다. 내 주량도 잘 몰랐다. 소주 병나발을 불고 필름이 끊겼다.

정신을 차렸을땐 변기에 앉은채 내 옷에 토를 한 상태였다. 

후임이 상급부대 검열이 왔다며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난 옷을 벗어 세탁기에 넣고 잠들었고 뒷처리는 후임이 했다.

고비는 넘겼지만 이사하는 당일 난 숙취에 시달린채 이사를 해야했다.

그날따라 행정보급관은 나를 손수 지휘하며 쉴틈이 없게 만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해안 철수 후 병장 생활은 그저 기다리는 날 뿐이었다.

유격훈련은 태풍 덕분에 취소가 되었고, 대부분의 시간은 부대정비를 했다. 

전역을 한달 남겨둔 나와 동기들 10명은 작업조로 편성되어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작업을 했다.

(100명중 10명이 말년이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모두들 눈치보며 이곳저곳으로 도망다녔다.

숨을 곳을 찾다보면 다른 동기가 먼저 숨어있었다.

행정보급관과 숨바꼭질 놀이는 쉽지 않았다.

 

나는 한 중사에게 전화로 반말을 하는 사건이 있었다.

"통신보안 중사 이XX입니다" (잘 못 들었다.. 가는귀가 먹어서..)

"야, 식사 다음팀 올려보내. 왜 반말이냐고? 너도 병장이잖아 병신아, 이XX 중사라고? 지랄하지마"

(동기인줄 알았다.)

덕택에 중사는 전역할때까지 나를 전담마크 하며 갈궜다.

 

전역 한 달을 남긴 어느 시점 당직병으로 근무를 서고 있던 새벽, 급박한 상황이 전파됐다.

처음에는 북한 주민의 귀순에 대한 전파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GP에 미상의 공격이 있다는 내용이 전파됐다.

결국 밝혀진건 아군의 총기난사였다.

김 일병 총기난사 사건이었다. 

왕따를 당하던 일병이 자신의 내무실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었다.

다음날 우리 부대는 임시로 모든 작업과 훈련을 중단하고 부대 점검을 했다.

정신교육을 하고, 설문지로 혹시 모를 문제들을 찾았다.

 

군대에 있는 동안 수 많은 사건들을 듣게 된다. 

가장 기억에 남는건 말년 병장이 상병과 함께 외박을 나갔다가 

자고 있는 상병을 추행하다 걸린 후 수치심에 자살한 사건이었다.

비오는 날 순찰 후 탄띠에 수류탄이 들어있단 사실을 잊고 난로에 널어두었다가 폭발한 사건도 있었다.

그 이후 우리도 난로 사용이 금지되어서 기억에 남는다.

자살은 일상적으로 들려온다. 내가 전역한 후에 우리 부대에서도 자살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군 생활의 목표는 하나뿐이다. 뭘 얻을 필요도 없다.

반드시 다치지 말고 살아 돌아와야 한다.

 

전역날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전역을 며칠 남기고 내 동기는 마지막 남은 휴가증을 사용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2박3일 전술훈련에 참여해야 했다.

훈련 지역은 이등병때 있었던 '이상한 나라' 였다.

나는 훈련할 필요가 없으니 지원조로 배정됐다.

후임들이 쉬고 있는 동안 불발탄이 난무하는 숲속에 사격용 타겟을 박고 와야했다.

그래도 '이상한 나라' 막사를 지나고, 산에서 이등병 시절을 보낸 그 곳을 내려다보며 나름 감상에 젖기도 하며 마지막 훈련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일요일, 나는 후임들의 배웅을 받으며 동기와 함께 위병소를 나섰다.

어린 시절 봤던 글들에서 위병소 나설때 짜릿함에 대해 읽었지만 그런건 없었다.

일요일에는 행정보급관이 출근하지 않은 턱에 빼앗긴 물건도 없었다.

(보통 A급 전투화를 빼앗아 간다.)

훈련소부터 함께한 동기 2명과는 '다음에 연락할게' 라고 짧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사실 전화번호도 몰랐다.

 

간성터미널에서 동서울터미널행 버스를 탔다. 빙빙 돌아가는 시외버스였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꾸벅꾸벅 졸며 많은 꿈을 꾸었다.

집에 도착했을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언제나 처럼 집은 죽은듯이 조용하고 나의 옥탑방은 여름 햇볕에 뜨거웠겠지.

 

전역 후에는 진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지. 쓸데없는 자신감이었다.

군대에 다녀왔다고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며칠 후 부터 나는 다시 게을러졌다. 군대의 기억은 다시 꿈처럼 흐릿해졌다.

어쩌면 군생활은 버스에서 꾸었던 긴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나는 군대에 다녀왔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해졌다.

 

* 전역 이후

7월 전역한 덕에 나는 9월에 바로 복학할 수 있었다.

그때는 진짜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었겠지만 사실 난 22살 어린애일 뿐이었다.

(학교에선 복학생 취급 받았지만...)

 

친구들은 이제 일병이나 상병을 지나고 있었으니 다들 나를 부러워 했다.

다시 입대하는 꿈은 꾸지 않았다.

가끔 몇몇 사람들이 군대의 말년병장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던데 난 그런적이 없다.

친구들과는 군대얘기를 잘 하지 않았다.

예비군도 학생 예비군으로 대부분 끝냈다.

연락하던 선후임들도 각자의 생활에 바빠지면서 연락이 뜸해졌다.

술자리 몇번과 결혼식 몇번에 참여했다.

술자리의 주제들은 군대 얘기 말고는 할게 없었다. 

처음에는 신났지만 몇 번 만날수록 할 얘기도 줄었다.

서로의 기억도 달라져있기도 했다.

몇 년만의 만난 친한 후임이 남처럼 서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가 조용히 연락이 끊기는 사람도 있었다.

평생 안 잊을것 같던 군대의 기억은 그렇게 차츰 흐려져갔다.

수양록을 들춰보면 신교대를 함께한 동기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다.

누구보다 끈끈했고 꼭 연락한다고 수 차례 약속들을 하고 헤어졌지만

이름과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허무하게 잊혀졌다.

그땐 무엇이 그렇게 우리를 간절하게 만들었던건지 우스울 뿐이다.

 

살아가면서 가끔 생각나는건 신병교육대 막사 앞의 시멘트로 된 길이다.

시멘트길이 빛날 정도로 맑은 날이었고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길 옆 가로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아무 사건도 없었다.

그저 붉은 벽돌의 막사건물과 밝은 햇빛, 하얀 시멘트 길, 가로수가 있는 장면이 살아가며 순간순간 떠오른다.

왜 떠오르는 건지 이유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 장면이 생각나면 잠시 하던 일을 손놓고 먹먹해진다.

군대 이야기들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장면과 함께 뒤따르는 먹먹함이 몰려온다.

어쩌면 남은 여생동안 잠깐씩 내 일을 멈추게 만드는 기억이 될 지도 모르겠다.

 

전역 후 10년이 지나고 30대가 되었을때 가끔 낚시하러 내가 지키던 바닷가에 자주 갔다.

신병교육대에서 산을 오르내리며 먼발치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언젠가 꼭 다시 와볼거라고 다짐한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자주 갈줄은 몰랐다.

 

34살이 되던 해, 강원도 여행을 하며 내 버킷리스트의 한 줄을 실행했다.

"'이상한 나라' 다시 찾아가기. 그리고 그 앞에서 담배 한대 피우고 오기"

맞춰서 간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이등병 때 치뤘던 공포에 떨며 치룬 큰 훈련이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대규모 병력 이동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탱크 구경도 하고...(보병이라 탱크 보면 신기함)

 

담배 피우고 내려오다가 들개한테 쫓겨서 숲속에 갇혔다.

자고 내일 아침에 나가야 하는지, 군사지역을 넘어 가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개가 떠난 후 나올 수 있었다.

이제 진짜 다시는 안 갈거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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