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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짐

 

* 자대배치, 이등병

 

내가 배치받은 '이상한 나라'는 산 중턱에 있었다. 

언덕에서는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였고 부대 자체는 산에 둘러쌓여 있었다.

첫 배치 받는날, 부대로 올라가는 길은 급경사였고 바람이 쏟아져 내려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산 아래와는 달리 안개비가 날리고 있었다.

칙칙한 하늘아래 곧 무너질 듯한 건물이 보였고, 한쪽 구석에서는 새까만 사람들이 낙서투성이의 낡은 활동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군인이라기 보다는 거지 새끼나 노예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도 하나같이 그을리고 꼬질꼬질한 인상이었다.

그들이 내 고참이었다.

 

배치된 부대는 평범한 소총중대였다.

전입신고를 마치고 백여명의 중대원들이 가득찬 복도는 답답하고 습했다.

내무실로 돌아가자 험상굳은 사람들이 30명이 모두 날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질문했고 뻔한 대답을 했다.

목소리가 작으면 작다고 지랄, 크게하면 시끄럽다 지랄이었다.

 

점호시간이 되자 병장들은 나를 웃기려고 노력했다.

배에다 '왕' 이라고 써온 사람도 있었고, 팬티 내리고 덜렁거리고 춤추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실제 웃는다고 해서 심하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에 발생했다. 다음날 청소시간에 병장이 한 상병을 놀렸다.

상병의 별명은 '건담' 이었고, 상병의 얼굴을 보는 순간 '건담' 과 꼭 닮아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청소시간 후 상병은 나와 몇몇 고참들을 데리고 불꺼진 탁구장으로 데려갔고 욕을 퍼부었다.

어둠 속의 빨간 담뱃불과 욕설은 그 이후로도 자주 봤다.

 

전입간 첫 주는 내무실에 하루종일 앉아있었고 고참들은 사격 훈련을 받았다.

난 내무실에 앉아 하루종일 앉아서 총소리만 들었다.

훈련소에서 들려오는 단발의 '땅땅땅' 소리가 아니라

기관총과 유탄발사기와 박격포 소리가 섞인 소리였다. 뭔지도 몰랐고 그냥 전쟁터의 소리같았다.

다른 소대에 갔던 동기는 낮에 모포를 깔고 자다가 고참에게 걸렸고 욕을 많이 먹었다.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고참들의 입을 타고 소문들이 전해졌다.

나는 6시 기상나팔이 울렸을 때 알아서 잠에서 깨지 못했다.

내 잠은 병장들의 모포 개는 일을 마친 상병이 손수 깨워주었다.

한 번은 자던 중 옆에서 자던 병장의 얼굴을 쳤다.

(물론 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많이 혼났다. 개념없는 이등병의 소식은 또 이곳저곳에 전해 졌다.

 

자대에 간 초반은 그래도 재미있는 일들도 있었다.

훈련소 퇴소 후 2개월만에 본 TV는 매우 선정적이었다. 2개월만에 이렇게 세상이 많이 바뀌었나 싶을 정도로.

이효리, 채연이 컴백한 시기였다.

주말 저녁에는 연등이라 하여 취침시간을 늦추고 잠자리에서 드라마를 볼 수도 있었다.

김희선 박한별이 나오는 '요조숙녀'를 한쪽 구석에서나마 볼 수 있는 것도 이등병 시절의 낙이었다.

추석연휴 치룬 체육대회는 응원하는 것도 꽤 즐거웠다.

토요일 밤에는 대대 건물 앞에 빔 프로젝터를 놓고 영화를 틀어줬다.

우리는 판쵸우의와 모포를 깔고 과자를 먹고 가끔 담배도 피우며 '살인의 추억'을 봤다.

고 장진영씨가 출연한 '싱글즈' 를 봤던 기억도 난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 아래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보던 일은 꽤 낭만적이었다.

 

대기기간이 막 풀리자마자 태풍이 왔다. 워낙 바람이 심한 지역인데 태풍이 지나가면서 막사 전체가 뒤집히는듯 했다.

태풍 '매미'였다.

밤에는 바람때문에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낮에는 수로를 뚫기 위해 1000삽 푸고 한번 허리펴기 운동을 했다.

어디서 온건지 모를 바위가 길을 막고 있어 치워야 했다.

고참들은 태풍 루사 때 해안 소초가 사라졌던 얘기를 해줬다.

 

자대 생활에 적응해갔지만 갈굼은 끊이질 알았다. 병장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성격을 가늠할 수 없었다.

예전 군대의 분위기가 남아있어서 유난히 거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우리 때도 폭행은 없었다. 주로 욕을 하고, 독서나 편지쓰기 같은 것들을 제한했다. 

벽을 보고 서 있으라거나 기합을 주는 일도 있었다.

제일 난감한 것은 '네 위로 내 밑으로 다 데려와' 였다.

 

전입온지 한달쯤 되었을때 불침번을 서던 중 말년병장이 자기 총을 꺼내달라 했고, 난 어둠속에서 버벅거렸고,

말년병장이 근무에 늦었다. 화가난 병장은 '니 위로 내 밑으로'를 시전했다.

한 90명쯤 데려가야 했다. 결국 못 했다.

고참들은 나 대신 욕을 많이 먹었지만 말년의 꼬장이라고 생각했는지 나한테 뭐라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난감함과, 혼나고 있는 고참들에 대한 미안함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만큼 병사들 간의 계급이나 내무 부조리는 많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짬밥이 안 되는 병사들은 여가시간을 주로 화장실에서 많이 보냈다.

걸레를 빨아서 몽둥이처럼 딱딱하게 말아놓는 일을 해야 했다.

의미도 없는 일을 시켰고, 고참들은 짬밥을 먹은 후임들은 그 노역에서 제외시켜준다.

계급별로 걸레빨기, TV나 PX이용, 독서, 사제 물품 사용 등에 제한을 두면서 후임들을 관리했다.

그래도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것처럼 전입간 날 이유없이 때린다든지,

고문에 가까운 일들을 한다든지 하지는 않았다.

그냥 잠깐 포기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견딜만한 일들이었다.

 

가끔은 한 밤중에 모두 일어나서 군장을 싸야 했다. 

우리 부대의 임무 중 하나는 의심되는 일이 있을때 먼저 출동하는것이었다.

나는 뭔지도 모르고 군장을 싸고, 실탄까지 꺼내온 일도 있었다.

실탄을 쌓아두고 침상에 걸터앉아 명령을 기다릴때, 

고참들은 7년전의 간첩 사건 때의 일을 고참의 고참의 고참으로부터 들은 얘기들을 전해줬다.

몇 명이 죽었고, 누군가는 적의 총에, 누군가는 오발사고에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긴장한 채 식은땀을 흘리다가 상황이 해제되면 다시 잘 수 있엇다.

 

가끔은 5분 대기조로 잠도 군복을 입고 자야고 샤워도 할 수 없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무장을 하고 뛰쳐나가야 했는데 난 그 순간이 싫지 않았다.

뭔가 짜릿함이 있었고, 그 순간이 정말 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다행인 것은 실제 상황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입대 3개월이 지난 10월달, 난 백일휴가란 이름으로 첫 휴가를 나갔다.

나에겐 몇 년같이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는데 아직 영장도 안 나온 친구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20살이 안 된 친구들 덕에 술집에서 '뺀찌'를 먹기도 했다.

잠깐 나가있는 동안은 내가 군인이란걸 또 잠깐 잊었다.

하지만 들어가기 싫었다. 들어가면 큰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에서는 평소에는 작업을 하고, 사격이나 각개전투 같은 것들을 학교에서 수업하듯 배운다.

학교와 마찬가지로 중간고사 격인 '전술훈련'을 한다.

이땐 실제 전쟁이 난 것을 가정해 군장을 싸고, 모든 전쟁물자를 꺼내고, 내무실의 모든 것을 파기하고, 행군을 한다.

 

행군은 사실 걷는게 아니다. 전쟁이 났다고 생각하고 이동하는 것이니 뛰듯이 걸어야 한다.

행군이 끝나면 정찰하고 각개전투를 하기 위해 총을 들고 또 뛰듯이 걸어야 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정도를 넘어 폐에서 피를 토할 것 같다.

발에 물집 잡히고 어깨가 아프다. 사실 걷는동안은 다친 걸 잘 모른다. 

그냥 헐떡거리며 앞사람을 쫓아가고, 그냥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절해버리길 바랄 뿐이다.

거점 점령을 위해 군장을 매고 산에도 올라야 했다.

다 싫었다.

 

결국 백일휴가 후 나의 10명의 동기들중 1명은 복귀하지 않았다.

가장 두려웠던 휴가 후 훈련은 내내 비가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 봤던 축축하게 젖어 무거운 전투화와 전투복을 입고 끊임없이 걸어야하는 모습이 생각났다.

(훈련 얘기는 따로 쓰기로 한다.)

 

11월, 훈련은 끝났고, 훈련 후 비에 젖었던 것들을 정비하며 며칠이 지났다.

고참들은 눈이 올거라며 겁을 줬지만 눈은 오지 않았다.

12월은 나름대로의 연말과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나의 이등병 생활은 끝이 났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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